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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20190617


나는 시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외려 시파트가 너무 지루했다. 그냥 넘기려다가 대충 읽어서 넘겨버렸음.


p38.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p64. 나이를 먹고 보니, 라고 건방을 떨 나이도 아닌데 나는 이 세상 많은 것들의 덧없음을 점점 더 자줒 느낀다. 그리고 그 덧없음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 그걸 눈치챈 어떤 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환멸은 인생 감정 공부의 마지막 단계지. 자네는 이참에 좀 더 성숙해질 모양이군." 그런가. 그렇다면 이 '성숙한 환멸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p132.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준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p153.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랑은 식도 재능은 사라지고 희망은 흩어진다. 삶의 그런 균열들 사이로 음악이 흐를때, 변함없는 음악은 변함 많은 인생을 더욱 아프게 한다. (중략) 인생은 짧고 음악은 길다.

p175.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들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p217.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p292.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어떤 분이 나에게 물었다.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그래서 나는 행복은 그저 "불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행복은 우리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그 모든 시간의 이름이거나, 혹은 내가 불행해진 뒤에, 불행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뒤늦게 얻는 이름이라고.

p300. 황인찬의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 中 유독

p341. 그러나 설사 상대방이 가진 것에 매혹되면서 관계가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그 관계가 상대방이 가지지 모한 것에 대한 이해로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질 때에만,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p361. 정호가한 순간에 제대로 사용 될 때 어떤 오래된 단어는 갑자기 빛을 뿜어낸다.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는 길도 있지만 진부한 것들을 구원해내는 길도 있다. 그렇게 손에 쥔 말들로 우리는 아름답게 고유해질 것이다.

p364. 손편지라는 것은 왜 별 내용이 없어도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편지는 문어체의 공간입니다. 가족에게 보내는 다섯 줄 짜리 편지라 해도 일단 편지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이의 말투는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양식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무너체의 공간 안에서만 비로소, 구어체로는 담을 수 없는, 그 자신도 몰랐던 진심이 '발굴'되고 심지어 '생산'되는 일이 일어나느 것이라면 말입니다. 문어체만의 특별한 힘이라고 할까요.

p375.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은 변화시킬 수 없다." 물론 최악의 경우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믿고 변화를 거부할 때 일 것이다.

p385.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말을 쉽게 해왔다는 뜻일 수 있다.

p390.게으르게 만드러진 영화들의 공토엄 중 하나는 인간을 납작하게 그린다는 것이다. 어떤 영화에 하 번 보면 다 알겠는 평면적 캐릭터가 나온다는 것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타인이란 한 번 보면 대충 다 파악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믿고 있다는 뜻이다.

p395. "어렵고 지루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거나 그것을 칭찬하는 평론가를 볼 때 화가 난다면, 그서은 아마도 그들로부터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가장 대중친화적인 소설이나 영화라고 칭송되는, 그러니까 쉽고 재밌기만 한 작품을 보다가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작품들이 나를 포함한 대중을 '아무 생각없이 재미만을 탐닉하는 소비자'정도로 얕잡아 보고 있는 것 같아서다.

p398.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까 인생의 모든 나이에는 각각의 나이에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있는 것이더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중략) 그런데 선생님과 헤어진 이후에 내가 못다 한 말이 있음을 깨달았다. '선생님, 그럼 고통은요?인생의 모든 나이에는 각각의 나이에 감당해야 할 고통도 있겠지요?'

p402. 좋은 작품은 내게 와서 내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