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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p.12 지금도 나는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라는 식물의 방어 물질에 사랑의 묘약이 섞여 있다고 믿는 편이다.

p.14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

p.21 "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

p.24 "이 여자의 '생활'이 보여서"

p.55 나는 잠시 충만해져 '아, 보이지 않는 것에도, 그림자가 있구나' 감탄했다.

p.65 가을은 왔지만 가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지치지 않고 번식하는 계절, 이 지나치게 싱싱한 여름은 먹성 좋은 괴물처럼 뚱뚱해져갔다.

p.70 하지만 서로의 몸이 물처럼 편안하게 섞여지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자리끼를 찾듯 머리맡을 더듬다 그냥 그렇게 엉겨버리는 관계. 아찔하게 파도를 타는 게 아닌 깊은 물속을 유영하는 식의, 평범하고 아득한 정사.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몸을 탐하고 서로의 몸에 의지했다

p.95 그렇게 빗방울이 퍼져가는 모양을 그리다 보면 이상하게 내 안의 어떤것도 출렁여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p.100 하다못해 그들은 나보다 더 잘 울었으리라

p.126 칼바람이 불자 골리앗크레인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p.129 바람은 자기 몸에서 나쁜 냄새가 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노인처럼 주춤거리며, 저도 모르게 물컹해져, 저도 모르는 봄 비린내를 풍기고 있다.

p.133 언제나 '어디'가 중요하다. 그걸 알아야 어물 수도 떠날 수도 있다고.

p.133 웃을 땐 하얗게 웃고 죽을 땐 까맣게 죽어간 여자.

p.146 "그러니까 제 말은요. 그렇게 우연히 노래랑 나랑 만났는데, 또 너무 좋은데, 나는 내려야 하고, 그렇게 집에 가면서, 나는 그 노래 제목을 영영 알지 못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감동적인 음악을 들으면요. 참 좋다, 좋은데 나는 영영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을 거라는, 바로 그 사실이 좋을 때가 있어요."

p.172 누군가 발 디딘 땅이되 전체를 안아볼 수 없는 행성의 둘레로, 허기의 크기로, 마냥 그렇게.

p.175 세계는 전보다, 또 방금 전보다 푸르게 묽어지고 있었다.

p.176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 부르는 구름이었다.

p.202 세계는 전보다, 또 방금 전보다 검게 짙어져가고 있었다.

p.207 피로가 풀리며 내 안의 피도 제 속도를 찾는 느낌이 났다.

p.222 관광보다 정착의 느낌이 간절했다.

p.242 도심 바깥의 동떨어진 고요 탓에 저 아래 대처의 풍경은 이국에서 날아온 엽서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p.244 그렇게 오래 여행 가방 옆에 있자니 어쩐지 우리가 떠나온 사람 떠나갈 사람이 아니라 멀리 쫒겨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p.250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 될 수 없을 거란 불안을 안고.

p.263 날이 맑아 하늘에는 총총 별이 있고, 여름 미풍에 가슴이 널을 뛰는 게, 아무나 막 사랑해버리고 싶던 밤.

p.266 "태국에 와 있다. 우리는 틈나는 대로 딴 나라말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내 나라말을 딴 나라말이라 불러보니 좋다. 고국에서는 한국어를 '하는' 혹은 한국어가 '있는' 느낌이었는데, 외국에서는 '한국어를 가지고 다니는' 기분이다."

p.291 지금은 새벽이라 불 밝힌 집이 많지 않은데, 몇몇은 추위 덕에 더 오롯하게 빛나네요.

p.292 괄호 속에 갇힌 물음표처럼 칸에 갇혀 조금씩 시들어갔을 언니의 스물넷, 스물다섯, 스물여섯…… 서른하나가 가늠이 안 됐거든요.

p.296 그래도 누군가 그렇게 저한테 어려움 없이 안기면 걔들과 결코 오래 볼 사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가슴 한쪽에 슬며시 온기가 퍼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p.297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p.301 말 그대로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은 거. 올바르고 아름다운데, 실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들 말이에요.